“500개의 나무, 200명의 시간”… 기후위기와 4·3을 동시에 품은 아이들, ‘거대한 색의 파도’를 만들다
겨울, 제주문예회관 제3전시실 문을 여는 순간 전시장은 하나의 거대한 호흡으로 관람객을 감쌉니다. 형형한 색면과 투박한 선, 그리고 벽을 가득 메운 나무 블록들이 파도가 되어 밀려옵니다. 정적이어야 할 공간이 한편의 ‘움직이는 기억의 장면’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2025 전도 장애학생·학부모·교사 미술전시회 ‘일상 그 너머의 기억과 변화’는 이렇게 시선을 붙잡으며 막을 엽니다. 올해 3회째를 맞은 이 전시는 ‘장애학생 미술전’이라는 말로는 시작할 수 없습니다. 기후위기와 제주 4·3, 그리고 오늘의 일상이 한 화면 안에서 동시에 흔들립니다. 200명의 아이가 500개의 나무 블록에 새긴 것은 색이 아니라 시간이며, 풍경이 아니라 기억입니다.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입니다.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현재를 관람객에게 묻습니다. 학생 76명, 학부모 3명, 교사 5명 등 84명이 참여해 총 64점의 개인·협동 작품을 선보이며, 도내 12개 학교 200명의 학생이 함께 완성한 대형 ‘기후변화 협동 작품’이 그 중심을 차지합니다. 500개의 나무 블록은 설치물이자 기록이며, 동시에 전시 서사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 구조물입니다. ■ 500개의 나무는 체온으로 기록한 기후위기다 나무 블록 하나하나에는 아이들이 각자 적은 날짜와 날씨, 체감 온도와 그날의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부터 하루의 풍경까지를 담은 짧은 문장들이 서로 다른 글씨로 빼곡히 들어서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큰 그림인데, 가까이 다가가면 전시는 ‘읽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시선을 옮길 때마다 또 하나의 아이, 누군가의 하루가 말을 겁니다. 기후위기는 이곳에서 미래형 경고가 아니라, 이미 지나온 현재형 사건으로 ‘지금’을 말합니다. ■ 동백꽃과 캐릭터는 4·3과 환경을 번역한다 전시장 한쪽에는 붉은 동백꽃이 반복되는 회화들이 걸려 있습니다. 또 다른 벽에는 재활용 분리수거통 앞에 선 만화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캔’, ‘유리’, ‘플라스틱’이라는 단어는 아이들 손으로 다시 적혔습니다. 4·3은 아이들에게 추상적인 비극이 아니라 꽃의 색으로 번역된 기억입니다. 환경 역시 교과서에 실린 경고가 아니라, 자신이 매일 버리는 쓰레기와 맞닿은 현실로 다가옵니다. 전시는 사회적 의제를 ‘배운 결과물’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언어로 다시 ‘재해석’한 장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서로 다른 뇌의 언어가 만나 하나의 예술이 된다 최근 예술교육과 인권 담론의 중심에는 자폐·ADHD 등 신경 발달의 차이를 ‘결함’이 아닌 인지 방식의 차이로 바라보는 ‘뉴로다이버시티(neurodiversity·신경다양성)’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시장에 걸린 이 아이들의 작업은 바로 그 철학을 이론이 아니라 예술로 보여줍니다. 번지듯 겹쳐진 색, 때로 중심을 벗어나 흔들리는 선이지만, 그 모든 점·선·면은 미숙함이 아니라 각자의 감각이 세계를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입니다. 누군가의 속도에 맞추지 않은 리듬, 표준화된 정답이 아닌 자기만의 응답이 이 전시를 지배합니다. 장애는 이 공간에서 아무 흠이 되지 않습니다. ■ 아이들은 “당신의 일상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올해는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해입니다. 그 역사적 시간선 위에서, 아이들은 ‘일상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그림으로 던집니다. 평범한 하루의 풍경과 4·3의 기억, 가족의 얼굴과 동백의 색이 한 화면 위에서 맞물립니다. 한상희 서귀포중학교 교장은 전시를 준비하며 “아이들이 이번 작업을 통해 ‘나의 일상이 어디에서 시작됐는가’를 고민했다”며 “이 그림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사랑하며 미래를 밝히는 빛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이 말은 전시장을 채운 작품들에 그대로 겹쳐지며, 관람객에게도 같은 질문을 되돌려 줍니다. ■ QR코드는 또 하나의 전시를 연다 각 작품에는 QR코드가 부착돼 있습니다. 관람객은 휴대전화를 통해 아이들의 설명, 제작 과정, 교사의 기록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한 감정과 기억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또 한 번 확장됩니다. 이번 전시는 서귀포중학교를 중심으로 도내 12개 학교, 세 개 특수학교, 교육청, 문화예술진흥원, 학부모, 지역 예술가가 함께 만든 협력형 예술교육 프로젝트입니다. ‘특수교육의 행사’가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가 함께 구축한 하나의 공적 예술 장면입니다. 전문적학습공동체인 ‘특별한갤러리’가 기획을 맡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교사들이 스스로 전시 기획자로 나서 교육과정을 전시장으로 확장하는 구조는, 학교 안에 머물던 미술 수업을 지역사회와 공유 가능한 공공재로 바꾸고 있습니다. ■ 전시는 감동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일상 그 너머의 기억과 변화’는 굳이 눈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오래 남는 질문 하나를 관람객에게 건넵니다. “당신의 일상은 과연 안전한가요.” 기후는 불안정해지고, 기억은 여전히 현재형이며, 아이들은 그 모든 변화를 이미 자신의 언어로 기록해왔습니다. 이 전시가 특별한 이유는 ‘장애학생들이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미뤄두고 외면해 온 질문을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먼저 꺼내 들었기 때문입니다. 11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는 무료 관람입니다. 다만 전시를 보고 나오는 순간, 관람객은 더 이상 ‘무료’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 장면에 마음이 머물렀다면, 그 발걸음 위에는 이미 하나의 물음표가 얹혀 있기 때문입니다.
2025-12-07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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